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문단 편집) === [[미국]] 정상과의 관계 === 틈만나면 [[존 F. 케네디]]를 얕잡아보던 [[니키타 흐루쇼프]]와 달리 브레즈네프는 상대적으로 미국 정상과의 관계는 원만했다. * [[린든 B. 존슨]] - 서구와 계속 갈등을 빚던 [[니키타 흐루쇼프]]를 축출한 브레즈네프와 초기에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브레즈네프는 미국을 두고 '야만적인 침략자'라고 맹비난했고 양국 간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64-68v14/Summary|#]] 그럼에도 미소 양국간의 여러 가지 협력과 교류는 계속되었고 존슨은 직접 브레즈네프와 만나진 않았지만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과 여러 번 회담을 하며 의견을 공유했다.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64-68v14/Summary|#]] * [[리처드 닉슨]] - [[데탕트]] 시대를 연 주역으로 둘 사이의 관계는 화기애애했다. [[전략무기제한협정]]으로 양측의 군비를 통제한 데 이어서 여러 번의 정상회담을 통해 미소 양국간 경제-문화적 교류도 이전보다 향상되었다. 서비스 차원에서 브레즈네프를 직접 [[에어포스 원]]에 태우고 [[그랜드 캐니언]]을 구경시켜주기도 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친분은 [[제4차 중동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했고 세계 주요 여론은 드디어 냉전이 종식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품기도 했다. [[https://www.nixonfoundation.org/2010/07/nixon-and-brezhnev-personal-partners-in-detente/|#]][[https://www.rferl.org/a/us-russia-nixon-brezhnev/25083345.html|#]] 하지만 미국에서 [[워터게이트]]라는 초대형 사건이 터지면서 데탕트 또한 닉슨과 같이 비판을 받으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닉슨의 사임 몇 달 전부터는 비밀 외교의 서신이 점점 초현실적인 성격을 띠어갔다. 이는 고립된 닉슨이 폭풍우 몰아치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바다에서 브레즈네프와의 우정을 평온한 섬으로 여긴 것이었다. 이에 대한 보답이었는지 브레즈네프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이용하여 정치적 목표를 이루려 하지 않았으며, 마지막까지 닉슨을 지지한 유일한 외국 지도자가 되었다. [[https://m.youtube.com/watch?v=_-wtBqgU1NU&feature=youtu.be|서로 사인 잘 하고 있나 감시하는 개그를 선보이는 두 정상들]] * [[제럴드 포드]] -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국내외 데탕트에 대한 지지가 사라지자 미국 지도부는 소련에게 모욕을 주며 [[미-소 무역법안]]을 스스로 폐기하게 만들며, 블라디보스토크 [[전략무기제한협정]][* 이 협정에서 브레즈네프는 2번이나 쓰러졌다. 첫 번째 쓰러졌을 때 주치의들은 회담을 연기할 것을 권고했지만 강행하기로 했으며, 치열하고 힘든 협정을 마치자 두 번째로 쓰러졌다. 이로 인해 브레즈네프는 몇 주 동안 회복을 못했으며 건강도 크게 악화되었다. 그나마 이후 다시 일어나 업무에 복귀하긴 했지만 1975년 이후에 촬영된 사진들을 보면 이전에 비해 확실히 나이가 들고 건강도 나빠진 것을 알 수 있다.]의 조인도 거부하며, 데탕트에 비협조적으로 변했다. 그래도 워터게이트 사건의 훨씬 전부터 진행되던 1975년, 역사적인 [[헬싱키]] 협정에 브레즈네프가 간신히[* 건강이 크게 악화돼서 거의 [[혼수상태]]로 최종 의정서에 서명했다.] 서명할 수는 있었고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를 비롯한 우주 분야에서의 협력은 개시되었다. * [[지미 카터]] - 양측과의 정상회담과 교류는 지속되고 있었으나 지미 카터는 소련을 불신하고 있었고 데탕트 체제는 점점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2차 [[전략무기제한협정]]이 결렬되더니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벌여지면서 데탕트 체제는 붕괴되고 카터는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고 곡물 금수 조치를 취하며 소련에 대한 압박 정책을 취했다. 카터는 재임 기간만 하더라도 [[공화당(미국)|공화당]] 인사들한테 유약한 지도자로 비난받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LGM-118A 피스키퍼|MX 미사일]]과 같은 적극적인 군비증강 프로젝트를 착실히 준비해 소련을 군사력으로 압도하려고 준비하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https://history.state.gov/milestones/1981-1988/u.s.-soviet-relations|#]] * [[로널드 레이건]] - 브레즈네프 생애 말기에 레이건이 당선되었기에 큰 접점은 없었으나 레이건은 집권 초기 부터 대소련 강경주의를 선포했고 1981년,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치하 폴란드의 계엄령과 노조탄압을 돕는 소련에 대한 추가 경제제재를 취하며 악화 일로를 걸었다. 브레즈네프도 개인적으로 입만 열면 소련을 비난해대는 레이건을 혐오했고, 미국의 다음 대통령은 좀 더 친소적인 인물이 당선되기를 기다렸다. 레이건은 브레즈네프에게 추가적인 군비 통제 협정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브레즈네프는 응답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